오규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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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규 마쓰다이라가는 마쓰다이라 씨의 분가로, 미카와국 오큐(현재 아이치현 도요타시)를 영지로 삼아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라 불렸다. 에도 시대에는 후다이 다이묘 4가 외에도 많은 하타모토를 배출했으며, 아라이 하쿠세키의 저서에는 '오기우 마쓰다이라'로 표기되기도 했다. 오규 마쓰다이라가는 니시오 번, 후나이 번, 오쿠토노 번, 이와무라 번 등 여러 번을 이루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 제도를 통해 자작, 백작 가문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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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무로마치 시대 마쓰다이라 씨의 당주로서 사료에서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인물이며, 가문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고, 많은 자녀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의 기반을 닦았다. - 마쓰다이라씨 - 고이 마쓰다이라가
고이 마쓰다이라가는 미카와국 고이 지역을 발상지로 하는 마쓰다이라 씨의 지류로, 마쓰다이라 타다카게를 시조로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에도 시대에 요리아이 가문으로 성장했고, 이후 분가에서는 막신과 봉행 등을 배출했다. - 오규 마쓰다이라씨 - 가라쓰성
가라쓰성은 1595년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축성을 시작하여 1608년에 완성되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폐성되어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현재의 천수각은 1966년에 재건되었다. - 오규 마쓰다이라씨 - 고바리번
고바리 번은 에도 시대 히타치국에 존재했던 번으로, 센고쿠 시대 격전지였던 이곳에 1603년 마쓰시타 시게쓰나가 입봉하며 처음 성립되었다가 1623년 폐지, 1679년 마쓰다이라 노리마사가 들어오며 재건되었으나 1682년 고모로번으로 이봉되며 완전히 폐지되었다.
오규 마쓰다이라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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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가문명 | 오규 마쓰다이라가 (大給松平家) |
가문 문장 | [[파일:丸に釘抜き.jpg|틀:lang|ja|丸に釘抜き]] (마루니쿠기누키, 둥근 못 뽑이) |
가문 문장 (본가) | 미쓰바아오이 (三つ葉葵, 세 잎 아욱) |
본성 | 칭호, 세이와 겐지닛타 씨 지류 |
가조 | 마쓰다이라 노리모토 |
종별 | 무가, 화족(백작) - 다쓰오카 오규 가문 |
종별 (종가) | 화족(자작) - 종가 |
종별 (후나이 오규 가문) | 화족(자작) - 후나이 오규 가문 |
종별 (이와무라 마쓰다이라 가문) | 화족(자작) - 이와무라 마쓰다이라 가문 |
출신지 | 미카와국가모군 오규 |
근거지 | 미카와국가모군 오규, 도쿄부도쿄시 |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노리오키 |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노리사다 |
주요 인물 | 센 소시쓰 (우라센케 11대 가주, 겐겐사이) |
주요 인물 | 오규 고토 (마쓰다이라 노리모토) |
지류 | 미야이시 마쓰다이라 가문 |
2. 역사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은 미카와 국가모 군 오규(현재의 아이치현도요타시)를 영지로 삼았기 때문에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라 불렸다. 에도 시대에는 후다이 다이묘 가문 외에도, 수많은 하타모토를 배출했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반한보』에서는 "오기우 마쓰다이라"로 표기하기도 했다.[4]
2. 1. 기원
『관영보』를 비롯한 에도 막부의 편찬 사료에서는 마쓰다이라 친타다의 차남 노리모토를 시조로 한다. 한편, 『미카와 이야기』에서는 노리모토를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차남, 즉 친타다의 형제로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막부의 편찬 사료는 노리모토의 관직명을 "가가의 수"로 하지만, 실존하는 마쓰다이라 가가노카미는 이세 씨의 피관으로서 노부미쓰·친타다 부자와는 별도로 행동하는 존재였음이 무로마치 막부 주변의 고문서에서 밝혀졌다. 즉,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의 시조인 가가노카미는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이전에 마쓰다이라 종가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이거나, 원래 노부미쓰의 일족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문서에는 가가노카미의 실명이 전해지지 않아, 노리모토가 올바른 실명인지는 불분명하다)[2]。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마쓰다이라 일족 내에서도 특수한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안조 마쓰다이라 가문(후의 도쿠가와 종가)과는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산하에 들어간 것은 4대 마쓰다이라 친노리의 에이로쿠 7년(1564년) 이후로 여겨진다[3]。2. 2.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는 후다이 다이묘 4가 외에도, 수많은 하타모토를 배출했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반한보』에서는 "'''오기우''' 마쓰다이라"로 표기한다[4]。오규 마쓰다이라씨(宗家)는 가미노 나바번, 미노국 이와무라번, 토토미국 하마마츠번, 가미노 타테바야시번, 히젠국 가라츠번, 시마국 토바번, 탄바국 가메야마번, 야마시로국 요도번, 시모사국 사쿠라번, 데와국 야마가타번, 미카와국 니시오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에노리는 덴쇼 18년(1590년)에 도쿠가와가 간토로 이봉됨에 따라, 미카와국 오규로 바뀌어 가미노 나바 1만원을 받았다. 에도 시대에는 게이초 6년(1601년)에 미노국이와무라번 2만원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전봉과 가증이 반복되어 메이와 원년(1764년) 이후 니시오번 6만원으로 폐번치현까지 고정되었다. 마지막 번주 노리치카는 메이지 2년(1869년) 6월 19일 반적봉환으로 니시오번 지사에 임명되었으며, 메이지 4년 4월의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마쓰다이라 노리쓰구가 자작에 봉해졌다.
노리쓰구는 일본 적십자사 간부로 활약했다. 귀족원 자작 의원에도 5번 당선되었고, 궁내성 관료로서 종친료 심의관도 역임했다.
그의 아들 노리무네도 궁내성 관료가 되어, 황자 부육관, 어가소 주사, 히가시쿠니노미야 부 궁내 사무관, 이왕직 등을 역임했고, 퇴관 후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그의 대에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나카노구스미요시초에 있었다.
오규 마쓰다이라가 근정류(친청류)는 시모쓰케이타바시번, 미카와니시오번, 단바가메야마번, 분고가메가와번, 분고나카쓰루번, 분고다카마쓰번, 분고후나이번으로 전봉되었다.
조겐의 차남 친청의 계통인 근정의 아들 일생이 게이초 5년(1600년)에 1만원의 다이묘로 등용되었고, 가증과 전봉을 반복한 후, 만지 원년(1658년) 이후 분고국 후나이번에서 폐번치현까지 고정되었다.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지카사토는 메이지 원년(1868년) 3월 20일에 오큐로 성을 바꾸었고, 메이지 2년(1869년) 6월 22일 판적봉환으로 번 지사로 임명되었으며, 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까지 후나이번 지사를 역임했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화족에 포함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 오큐 지카미치가 자작에 봉해졌다.
그 아들 오큐 지카타카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지카타카 시대에 오큐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혼고구 고마고메 린초에 있었다.
오규 마쓰다이라가(노리마사류)는 히타치 고바리 번, 시나노 고모로 번, 미노 이와무라 번으로 전봉되었다.
종가인 노리토시의 차남 노리마사의 계통. 분여와 가증으로 엔포 7년(1679년)부터 히타치 고바리 번주 1만원이 되었고, 겐로쿠 15년(1702년) 이후 미노국 이와무라 번에서 폐번치현까지 고정되었다. 마지막 번주 노리카타는 메이지 2년(1869년) 6월 20일 판적봉환으로 이와무라 번 지사에 임명되었고, 메이지 4년 7월 15일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화족에 포함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동월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마쓰다이라 노리카타가 자작에 봉해졌다.
그 뒤를 이은 노리나가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3회 당선되어 역임했다. 그 아들 노리후미 대에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나카노구 사쿠라야마 정에 있었다.
오규(마쓰다이라)가는 미카와오규번, 미카와오쿠도노번, 시나노타노쿠치번(류오카번)으로 전봉되었다.
종가의 사네노리의 차남 사네쓰구의 계통. 사네쓰구의 아들 노리쓰구가 조쿄 1년(1686년)에 미카와오쿠도노번 주 1.6만원이 되었다. 마지막 번주 노리모 (후에 히사시로 개명)는 분큐 3년 (1863년)에 시나노국 타노쿠치에 진야를 옮겨, 막정에서 와카도시요리에서 로주 겸 육군 총재까지 출세했지만, 막부 멸망 후에는 신정부에 굴복하여, 메이지 원년(1868년) 2월 27일에 "오규"로 개성하고, 5월에는 번명도 류오카로 개명했다. 메이지 2년 (1869년) 6월 23일의 판적봉환에서 류오카번 지사에 임명된 후, 메이지 4년 6월 3일의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신정부에 출사하여 좌원 의관, 원로원 의관, 귀족원 의원, 상훈국 총재, 추밀고문관 등을 역임했다.
메이지 2년 (1869년) 6월 17일의 행정관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다이묘 가문으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의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오규 히사시가 자작에 봉해졌다. 게다가 히사시는 메이지 40년 (1907년) 9월 23일에 러일 전쟁의 공로로 백작에 승작했다.
사다이 대에 오규 백작가의 저택은 도쿄시세타가야구 타마가와요가정에 있었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마쓰다이라 노리치카는 1869년 6월 19일 판적봉환으로 니시오 번 지사에 임명되었으며, 1871년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1]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화족에 포함되었다.[2][3]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마쓰다이라 노리쓰구가 자작이 되었다.[4]
마쓰다이라 노리쓰구는 일본 적십자사 간부로 활약했다. 귀족원 자작 의원에도 5번 당선되었고, 궁내성 관료로서 종친료 심의관도 역임했다.[5]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노리무네도 궁내성 관료가 되어, 황자 부육관, 어가소 주사, 히가시쿠니노미야 부 궁내 사무관, 이왕직 등을 역임했고, 퇴관 후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5] 그의 대에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나카노구스미요시초에 있었다.[5]
마쓰다이라 지카사토의 분가(친청류)는 1868년 3월 20일에 오규로 성을 바꾸었고[6], 1869년 6월 22일 판적봉환으로 번 지사로 임명되었으며, 1871년 7월 14일 폐번까지 후나이번 지사를 역임했다.[6]
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화족에 포함되었다.[7][8]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 오큐 지카미치가 자작이 되었다.[9]
그 아들 오큐 지카타카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10] 지카타카 시대에 오규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혼고구 고마고메 린초에 있었다.[10]
마쓰다이라 노리카타의 분가(노리마사류)는 1869년 6월 20일 판적봉환으로 이와무라 번 지사에 임명되었고, 1871년 7월 15일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11]
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화족에 포함되었다.[12][13]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마쓰다이라 노리카타가 자작이 되었다.[14]
그 뒤를 이은 마쓰다이라 노리나가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3회 당선되어 역임했다.[15] 그 아들 마쓰다이라 노리후미 대에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나카노구 사쿠라야마 정에 있었다.[15]
오규 히사시는 분가(사네쓰구류)로서 1863년 시나노국 타노쿠치에 진야를 옮겼다. 막부 멸망 후에는 신정부에 굴복하여, 1868년 2월 27일에 "오규"로 개성하고, 5월에는 번명도 류오카로 개명했다. 1869년 6월 23일 판적봉환에서 류오카번 지사에 임명된 후, 1871년 6월 3일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신정부에 출사하여 좌원 의관, 원로원 의관, 귀족원 의원, 상훈국 총재, 추밀고문관 등을 역임했다.
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다이묘 가문으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오규 히사시가 자작이 되었다. 게다가 히사시는 1907년 9월 23일에 러일 전쟁의 공로로 백작으로 승작했다.
오규 사다이 대에 오규 백작가의 저택은 도쿄시세타가야구 타마가와요가정에 있었다.
3. 오규 마쓰다이라가 계통의 제번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은 여러 계통으로 분가되어 다양한 번을 다스렸다.
- 니시오 번: 노리모토(乗元)를 시조로 하는 오규 종가 계통이다. 1590년 가미노 나바 1만 석을 시작으로, 이와무라 번 2만 석을 거쳐 1764년부터 니시오 번 6만 석을 다스렸다.[1]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치카는 1869년 판적봉환으로 니시오 번 지사가 되었고,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이 되었다.[2] 마쓰다이라 노리쓰구와 그의 아들 노리무네는 궁내성 관료를 역임했다.[3]
- 후나이번: 지카키요(親清)를 시조로, 그의 손자 가즈나리(一成)를 중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1600년 1만 석 다이묘로 시작하여, 1658년부터 분고 후나이번을 다스렸다.[4]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지카사토는 1868년 오규로 성을 바꾸고,[4] 1869년 판적봉환으로 후나이번 지사가 되었으며,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오규 지카미치가 자작이 되었다.[5] 그의 아들 지카타카는 귀족원 자작 의원을 역임했다.[6]
- 이와무라 번: 노리마사(乗政)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1679년 히타치 고바리 번주 1만 석으로 시작하여, 1702년부터 미노 이와무라 번을 다스렸다.[7]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카타는 1869년 판적봉환으로 이와무라 번 지사가 되었고,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이 되었다.[8] 그의 뒤를 이은 노리나가는 귀족원 자작 의원을 역임했다.[9]
- 오쿠토노 번 → 류오카 번: 사네쓰구(真次)를 시조로, 그의 아들 노리쓰구(乗次)를 중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1686년 미카와 오쿠토노 번주 1만 6천 석이 되었다.[10] 마지막 번주 오규 노리모(후에 히사시로 개명)는 1863년 시나노 다노쿠치로 진야를 옮기고 류오카 번으로 개명했다. 그는 막부에서 로주 겸 육군 총재까지 역임했고,[11]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협력하여 1869년 류오카 번 지사가 되었다.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이 되었고,[12] 1907년 러일 전쟁의 공로로 백작으로 승작되었다.[12]
각 번의 역대 번주와 영지 규모 변화는 다음과 같다.
번 이름 | 시조 | 중시조 | 영지 규모 변화 | 비고 |
---|---|---|---|---|
니시오 번 | 노리모토 | 가미노 나바 1만 석 → 이와무라 번 2만 석 → 니시오 번 6만 석 | 오규 종가 | |
후나이번 | 지카키요 | 가즈나리 | 1만 석 → 분고 후나이번 | 1868년 오규로 성씨 변경 |
이와무라 번 | 노리마사 | 히타치 고바리 1만 석 → 미노 이와무라 번 | ||
오쿠토노 번 → 류오카 번 | 사네쓰구 | 노리쓰구 | 미카와 오쿠토노 번 1만 6천 석 → 시나노 다노쿠치(류오카 번) | 1863년 류오카 번으로 개명 |
4. 주요 분파
오규 마쓰다이라가는 크게 네 개의 주요 분파로 나뉜다.
- 종가 (宗家): 노리모토를 시조로 하며, 니시오 번을 다스렸다.
- 근정류(친청류): 지카키요를 시조로 하며, 후나이번을 다스렸다.
- 노리마사류: 노리마사를 시조로 하며, 이와무라 번을 다스렸다.
- 사네쓰구류: 사네쓰구를 시조로 하며, 류오카 번을 다스렸고, 후에 백작 가문이 되었다.
각 분파는 에도 시대 동안 여러 지역으로 전봉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4. 1. 종가 (니시오 번주 → 자작 가문)
노리모토를 시조로 하는 오규 마쓰다이라 종가는 가미노 나바 번, 미노 국 이와무라 번, 도토미 국 하마마쓰 번, 가미노 다테바야시 번, 히젠 국 가라쓰 번, 시마 국 도바 번, 단바 국 가메야마 번, 야마시로 국 요도 번, 시모사 국 사쿠라 번, 데와 국 야마가타 번, 미카와 국 니시오 번으로 전봉되었다.노리모토의 적류(嫡流) 계보인 이에노리는 1590년 도쿠가와가 간토로 이봉됨에 따라 미카와 국 오규로 바뀌어 가미노 나바 1만 석을 받았다. 에도 시대에는 1601년에 미노 국이와무라 번 2만 석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전봉과 가증이 반복되어 1764년 이후 니시오 번 6만 석으로 폐번치현까지 고정되었다. 마지막 번주 노리치카는 1869년 6월 19일 판적봉환으로 니시오 번 지사에 임명되었으며, 1871년 4월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五爵) 제도로 되면서,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노리쓰구가 자작에 봉해졌다.[4]
노리쓰구는 일본 적십자사 간부로 활약했다. 귀족원 자작 의원에도 5번 당선되었고, 궁내성 관료로서 종친료 심의관도 역임했다.
그의 아들 노리무네도 궁내성 관료가 되어, 황자 부육관, 어가소 주사, 히가시쿠니노미야 부 궁내 사무관, 이왕직 등을 역임했고, 퇴관 후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그의 대에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 시나카노 구스미요시초에 있었다.
4. 2. 지카키요 계 (후나이 번주 → 자작 가문)
지카키요 계통은 지카마사의 아들 잇쇼가 1600년에 1만 석의 다이묘로 등용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가문은 가증과 전봉을 반복하다가 1658년 이후 분고국 후나이번에 정착하여 폐번치현까지 이어졌다.[1]마지막 번주 지카사토는 1868년 3월 20일에 성을 오규로 바꾸었고,[2] 1869년 6월 22일 판적봉환으로 번 지사에 임명되었으며, 1871년 7월 14일 폐번까지 후나이번 지사를 역임했다.[3]
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화족에 포함되었다.[4][5]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구 소번 지사였던[6] 오규 지카미치가 자작에 봉해졌다.[7]
그 아들 오규 지카타카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8] 지카타카 시대에 오규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혼고구 고마고메 린초에 있었다.[9]
4. 3. 노리마사 계 (이와무라 번주 → 자작 가문)
마쓰다이라 노리토시의 차남 노리마사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분여와 가증을 거쳐 1679년부터 히타치국 고바리 번 1만 석의 번주가 되었고, 1702년 이후 미노국 이와무라 번으로 옮겨가 폐번치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다.[1] 마지막 번주 노리카타는 1869년 6월 20일 판적봉환으로 이와무라 번지사에 임명되었고, 1871년 7월 15일 폐번까지 번지사를 역임했다.[2]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公家)와 다이묘(大名)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화족에 포함되었다.[3][4]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마쓰다이라 노리카타가 자작에 임명되었다.[5]
그 뒤를 이은 노리나가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3회 당선되어 역임했다.[6] 그의 아들 노리후미 대에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나카노구 사쿠라야마 정에 있었다.[6]
4. 4. 사네쓰구 계 (류오카 번주 → 자작 가문 → 백작 가문)
사네노리의 차남 사네쓰구의 계통이다. 사네쓰구의 아들 노리쓰구는 1686년에 미카와 오쿠토노 번주로 1만 6000석을 받았다.[1] 마지막 번주 노리모 (후에 히사시로 개명)는 1863년에 시나노국 다노쿠치로 진야를 옮겼으며, 막부에서 와카도시요리를 거쳐 로주 겸 육군 총재까지 출세했다.[2] 그러나 막부 멸망 후 신정부에 굴복하여 1868년 2월 27일에 "오규"로 개성하고, 5월에는 번명도 류오카로 바꾸었다. 1869년 6월 23일 판적봉환으로 류오카번 지사에 임명된 후, 1871년 6월 3일 폐번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3] 이후 신정부에 출사하여 좌원 의관, 원로원 의관, 귀족원 의원, 상훈국 총재, 추밀고문관 등을 역임했다.[2]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다이묘 가문으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4][5]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오규 히사시가 자작에 올랐다.[6] 히사시는 1907년 9월 23일에 러일 전쟁에서의 공로로 백작으로 승작되었다.[6]
사다이 대에 오규 백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세타가야구 다마가와요가정에 있었다.[7]
5. 계보
'''범례'''
-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 숫자는 가독 계승 순
6. 관련 사찰 및 신사
- 작원 팔만궁(柞原八幡宮)・가라이 신사(賀来神社)(오이타현 오이타시) - 후나이번주였던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 숭경한 신사이다. 특히 가라이 신사는 에도 저택에 분령되었고(그 후 구게누마 해안으로 천궁), 다이묘 도구는 메이지 시대에 가라이 신사에 기증되었다.[1]
- 쇼묘인(松明院)(아이치현 오카자키시) - 초대 조겐(乗元)・5대 신조(真乗)의 묘가 있다.[1]
- 호주인(도요타시)(宝珠院 (豊田市))(아이치현 도요타시 아스케정) - 2대 조쇼(乗正)・3대 조쇼(乗勝)・4대 친조(親乗)의 묘가 있다.[1]
- 젠도지(善導寺(다테바야시시)) - 7대 조주(乗寿)의 묘가 있다.[1]
- 텐토쿠지(天徳寺)(도쿄도 미나토구)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종가) 8대 노리히사(乗久)・9대 노리하루(乗春)・10대 노리무라(乗邑)・11대 노리유(乗佑)・12대 노리카네(乗完)・13대 노리히로(乗寛)의 묘가 있다.[1]
- 세이간지(에나시)#류간지(류간지)(盛巌寺 (恵那市)#龍巌寺(龍岩寺))(기후현 에나시 이와무라정)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종가) 6대 이에노리(家乗)의 묘가 남아 있지만, 류간지는 폐사되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1]
- 세이간지(니시오시)(盛巌寺 (西尾市))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종가) 14대 노리마사(乗全)의 묘가 있다.[1]
- 세이간지(에나시)#조세이지(盛巌寺 (恵那市)#乗政寺)(기후현 에나시 이와무라정)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노리마사 류) 이와무라번주의 보리사였지만, 막말에 폐사되었다.[1]
- 슌쇼인(春性院)(다이토구)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노리마사 류) 이와무라 번주의 묘가 있다.[1]
- 고린지(光林寺)(도쿄도 미나토구)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노리마사 류) 이와무라 번주 자녀의 묘가 있다.[1]
- 반쇼인(蕃松院)(나가노현 사쿠시)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마사쓰구 류) 오쿠도노번의 영내 위패소. 막말에 타노구치번으로 이전하면서 실질적인 보리사가 되었다.[1]
7. 기타
참조
[1]
Kotobank
松平氏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旺文社日本史事典 三訂版、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2]
논문
大給松平家先祖再考
岩田書院
2023
[3]
논문
大給松平家先祖再考
岩田書院
2023
[4]
NDLDC
藩翰譜
吉川半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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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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